"대감마님 말을 대령했습니다. 떠나실 시각이 지났사옵니다.” 밖에서 상노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단부사 이서가 아내의 손을 놓고 일어서서 아내가 내미는 큰칼을 받아 드는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니 아내의 눈에 근심스러운 눈물이 가득 고여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어서 아내의 두 손을 꼭 모아 쥐니 아내의 눈에 무한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었고 뇌리에는 지난날의 무수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의 눈빛과 표정은 사랑과 존경으로 빛나고 있었으나 감출 길 없는 불안한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있었다. “부인! 염려할 것 없소. 나라를 위해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무인의 본분이오. 비록 외적과 싸우는 것은 아닐지언정 반정을 도모하는 것이 나라와 사직을 위함이니 어찌 두려워 하겠소.” “광해군의 폭정이 더 지나치게 되면 사직과 백성은 헤어날 길 없는 도탄에 빠질 것이요. 내 반드시 반정을 성사하겠소.”“그리하오나, 나으리, 일의 성패는 고사간에 이제 다시는 뵈올 수 없을까 염려 되옵니다.” “부인 반드시 돌아오리다. 일이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달겠소.” 이서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부인 만약에 일이 실패할 경우에는 나룻배에 흰기를 달겠소. 부인은 지체하지 말고 아이들 데리고 피하시오.” 이서는 말을 마치자 돌아서 방을 나왔다. 문 밖에는 부장과 상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서는 버선발로 뒤따라 뛰쳐나온 아내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에 올라 채찍을 내리쳤다. 아내는 중문 기둥에 몸을 기대고 멀어져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모으니 갑자기 가슴속이 공허해졌다. 하늘과 땅사이에 혼자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이 아득한 허공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아내는 전신의 힘이 말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가눌길 없는 몸이 풀썩 쓸어졌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계집종이 기겁을 하고 뛰어왔다.
때는 광해군 5년 삼월 열사흘의 밤 영창대군을 스스로 강화섬에서 죽게하고 생모 인목대비를 가두고 폐모함으로 해서 광해군은 스스로 반정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서를 비롯한 김유, 이괄, 이귀, 김자겸, 최명길 등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을 옹립하는 반정을 일으켰다. 아내를 작별한 길로 휘하의 칠백군병을 이끌고 임진강 덕진나루를 건너 질풍처럼 병사들을 휘몰아 고양군 면서역에 도착한 이서는 김유가 거느린 육백의 군사와 합류하여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다. 제 정신을 차린 아내는 목욕 재계하고 소복으로 갈아 입고 뒷뜰에 있는 단을 모아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아내는 한 차례 기도가 끝나면 나루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남편이 돌아올 뱃길을 지켜보았다. 칠일이 가고 열흘이 지나도록 남편의 소식은 없어 아내는 뒷뜰에 모은 제단과 언덕을 하루에도 수 없이 왕복하였다. 아내는 침식을 잃고 기도에 열중하니 수척해진 아내의 얼굴에는 어느덧 절망이 짙게 드리웠다. 이제 삶에 대한 의욕보다 남편의 생사를 알고 싶을 뿐 차마 남편의 생사도 모른채 죽을 수는 없었다. 아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남편의 거사는 실패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아내의 전신에 오한이 스치면서 남편의 몸에 내려지는 무수한 채찍이 아내의 몸을 마구 때렸다.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아픔과 함께 아내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신음소리가 아내의 가슴을 마구 찢었다. “부인 나, 나를 좀 살려주오. 이 묶인 오라를 풀어주오.” 그러나 아내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의 묶인 오라에 손이 닿지를 않았다. 아내가 기다리면 남편은 그 만큼 먼 곳으로 물러갔다.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아내는 자기 자신의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전신에 땀이 젖어 있었다. 계집종이 근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님, 정신이 좀 드셔요?” “오냐, 그런데 꿈이 이상하구나, 아무래도 나으리께서는 실패하셨나 보다. 차라리 나도 이대로 나으리의 뒤를 따르려 한다. ” “마님, 그 무슨 경망된 말씀을 하셔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더욱 소식없는 것이 좋은 징조라고 옛말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꿈이 심상치 않구나.” “아니요 마님 몸이 너무 허약해 지셨기 때문에 악몽을 꾸신 거예요. 몸을 보호하셔야겠어요. 병나시겠습니다.” “그랬으면 오죽 좋으랴. 아니야, 너는 상노와 함께 언덕에 올라가 보고 오너라. 나으리의 배가 올런지도 모르겠구나 하, 꿈이 이상하여 견딜 수가 없구나.” 아내는 계집종이 미쳐 방문을 나가기 전에 다시 불러 세웠다. “아니다, 내가 가야겠다. 내가 가서 직접 내 눈으로 보아야지.” 아내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반만 일어선 몸은 힘없이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내는 병을 앓아 눕게 되었다.
병석에 누운 아내는 헛소리처럼 남편을 찾았다. 그러나 무심한 것은 세월이었다. 쌀쌀하던 이른 봄의 바람이 훈훈한 봄바람으로 변하여 뜰앞에 꽃봉오리가 맺혀도 남편의 소식은 없었다. 어언 남편이 떠난 지도 한달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마님, 약을 드셔야지요.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오늘은 상노 아이를 한양으로 보내서 소식을 알아 오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서 약을 드시고 힘을 내셔요.” “약은 먹어서 무얼 하겠느냐 상노 아이에게 눈칫껏 일러야 하느니라.” “네, 눈칫껏 일렀습니다. 그러하오니 어서 약을 잡숫고 힘을 내셔요.” 아내는 상노 아이를 보내고 새로운 기다림으로 해서 얼마간의 힘을 얻었다.
“깃발이 보이느냐?” “마님, 깃발이라니요?”“나으리께서 돌아오시는 뱃길에 깃발을 세우기로 하셨다. 깃발이 보이느냐?” “깃발의 빛깔이 어떠하냐?” “마님, 아직은 멀어서 잘 알 수 없으나 붉은 깃발인가 합니다.” “붉은 깃발! 아, 천지신명이 무심치 않았구나, 일이 성사되어 돌아오시는 것이다.” 아내의 얼굴이 활짝 생기가 돌았다. 아내는 한달음에 언덕 끝까지 뛰어가 나룻배를 지켜보았다. 나룻배는 강심을 벗어나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집종은 다가오는 나룻배의 깃발이 붉은기가 아닌 것을 보았다.
깃발은 흰빛이었다. 계집종은 망설였다. “마님, 기가 보입니까?” “아니, 아직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분명히 붉은기라 했지?” “마님, 그러하오나...” 계집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을 잇지 못하느냐?” “실은, 이제보니 깃발은 흰빛입니다.” “흰기?” 아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흰기! 하늘이 너무도 무심하구나! 하늘이 버리시다니!...” 아내는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실신한 걸음으로 낭떨어지를 향해 걸어갔다. 계집종이 붙들기 전에 아내는 낭떨어지 밑으로 몸을 날렸다. 푸른 물결의 포구만이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장단 석벽을 치고, 이서는 상노아이의 전갈을 받고 서둘러 돌아왔다.
아내가 투신한 것을 들은 이서는 계집종을 돌아보며 까닭을 물었다.“어찌된 일이냐?” “대감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깃발이 희다고 여쭈었더니 그만 마님께서 강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무엇! 깃발이 희다니? 네 눈에는 붉은기가 어찌하여 희게 보였다는 말이냐?” 계집종은 말을 잃었다. “대감마님, 실은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갑자기 사공이 땅에 엎드려 이서를 쳐다보았다. “너는 왜 그러했느냐?” “소인이 하도 더워서 저고리를 벗어 걸었습니다. 기가 저고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감마님,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이서는 묵묵히 상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이서는 아내가 몸을 던진 언덕에 덕진당이라는 재각을 짓고 원혼을 위로하였다. 지금도 임진강 강가에 사는 어부들은 풍어나 수재를 막기 위해 덕진당에서 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십대손인 이서는 그 뒤에 완풍부원군에 이르고 벼슬은 호조판서, 경기관찰사, 호위대장, 수어사에 이르렀다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의 진중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