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사면 석불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일월봉 바로 아래 높이 1.95m의 화강암을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4면으로 다듬어 각 면에 한 구씩의 불상을 새긴 고려시대 사방불(四方佛)이다. 이 마애사면석불(磨崖四面石佛)은 얼굴과 손모양이 많이 마모되었지만 각 상의 세부는 분명한 편이다. 불상의 크기는 동면상(東面像)이 111cm, 서면상(西面像)이 90cm, 남면상(南面像)이 99cm, 북면상(北面像)은 가장 큰 126cm이다.
각 상들은 모두 두광(頭光)과 원형신광(圓形身光)을 갖추고 연꽃모양 대좌(臺座) 위에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있다. 손모양은 전통적인 사방불과 달리 밀교(密敎)의 금강계(金剛界) 사방불의 손모양을 하였는데 동쪽은 촉지인(觸地印)을 한 아촉여래(阿觸如來), 서쪽은 선정인(禪定印)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남쪽은 오른손을 내려 손가락을 편 보생여래(寶生如來), 그리고 북쪽은 두 손을 안쪽으로 모은 것으로 보여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절을 하던 배례석(拜禮石)과 계단이 남아 있어 이곳이 당시의 신앙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마애사면석불은 현재 우리나라 가장 북쪽에 위치한 사방불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말 라마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고려 전기 때 사방불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방불과는 다른 세계를 표현하고 있어도 불교 조각사 및 사상연구의 귀중한 예이다.
현재 이 지역은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으로 보호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 소재지 : 진동면 동파리 산 31-1
◎ 문의처 : 031) 940-4354
허준선생의 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의 허준(許浚 1537~1615)선생의 묘이다.
선생은 우리나라가 낳은 대표적인 명의·의학자로서 한의학 중흥의 거봉이자 동양의 의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의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용천부사를 지낸 허론(許論)의 서자로 선조 7년(1574) 내의원(內醫院)에 들어간 후 혜민서 봉사를 거쳐 전의(典醫)로 발탁되어 왕실의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웠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어의(御醫)로서 왕을 의주까지 모셨으며 1604년 호성공신3등에 1606년 양평군(陽平君)에 봉해졌다. 또한 사후에 숭록대부에 올라 의인으로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되었다.
저서로는 《동의보감》,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이 전한다. 광해군 2년(1610) 16년의 연구 끝에 간행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청나라 등지에서도 간행 보급되어 조선의학 내지 동양의학의 성전이 되었다.
그 동안 선생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씨 등이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위에 허준선생의 생모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平□ □聖功臣 □浚’이란 글자가 남아 있어 선생의 묘인 것이 확인되었다.
◎ 소재지 : 진동면 구암로 205
◎ 문의처 : 031) 940-4354(경기관광) / 010-2417-5100(해마루촌 이장)
덕진산성(사적 제537호)
◎ 소개

파주시 군내면에 위치한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덕진산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성은 최고봉인 해발 65m 봉우리를 중 심으로 산 능선을 따라 돌며 표주박 형태로 구축되어 있다. 외성에는 두 개의 문 지가 완연하게 남아있고 성 위에 담을 낮게 쌓았던 부분이 두 군데 있다. 비교적 낮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임진강의 북쪽 해안이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넓은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덕진산성에 대 한 기록은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 외 다른 지리지 등에 약간의 기록이 남아있다. 덕진산성은 1992년 국립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된 이후, 1994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의 파주시 군사유적 지표조사 및 2004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의 덕진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통해 문지와 우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삼국~조선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기와편이 다량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2012년부터 총 6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내성 전체 구간(600m)에 걸쳐 고구려 성벽이 구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고구려 성곽의 축성법은 흙을 다져서 토축부를 먼저 조성한 후 앞면에는 석축을 쌓았는데, 석축부를 쌓을 때에는 할석(쪼갠 돌)이나 가공석 사이사이에 점토를 채워가면서 쌓는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7세기 말경 신라가 점령하여 기존 고구려 성곽을 견고한 석축성으로 새롭게 구축하였고, 9세기에는 대대적인 수개축이 이루어졌다. 7세기 대에는 고구려 성벽의 토축부를 내탁부로 사용하여 편마암 계통의 성돌을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성벽을 조성하였고, 9세기 대에는 화강암을 가공한 성돌을 사용하여 덧붙여 쌓았다.
조선시대에는 17세기 광해군 대에 강기슭까지 외성을 덧붙여 쌓았는데 통일신라 성벽의 성돌과 대형의 성돌을 사용하여 성벽으로 구축하고 내탁부를 흙으로 조성하였다. 고구려가 초축하고 통일신라때 수개축을 거듭한 후 조선시대 외성을 덧붙여 쌓아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전시기의 유적과 유물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성곽 축성의 보고寶庫로, 인근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과 함께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중요한 고구려 방어시설로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유적이다.
◎ 소재지 : 군내면 정자리 13
◎ 문의처 : 031) 940-4354
읍내리 석조여래입상(문화재자료 제139호)
◎ 소개

이 석조여래입상은 민통선(民統線)지역인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 산 142번지 백학산(白鶴山)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석불은 현재 불신(佛身)과 불두(佛頭)가 절단된 상태로 불두는 배례석(拜禮石) 위에 놓여 있는데 다소 마모가 되기는 하였지만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불두 머리 위에는 육계(肉?)가 높게 원형으로 돌출되어 있으며, 육계 주변의 조각 상태와 별다른 결구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보개석(寶蓋石)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굴은 다소 평면적인데 눈은 선각(線刻)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코는 높다. 귀는 돋을대를 활용하여 상하로 길쭉하게 하였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불두는 전체적으로 정연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간략화나 형식화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불두 전체 높이는 134cm, 육계 높이 24cm, 머리폭은 63cm의 규모이다. 불신(佛身)은 원래의 자리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하부가 매몰되어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불신에 옷주름을 두껍게 표현하여 신체의 윤곽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다. 법의(法衣)는 목 아래로 깊게 파인 통견의(通絹衣)로 목 아래 법의 사이에V자형으로 파인 가슴에는 사각형의 장식물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있다. 옷주름은 일정한 간격으로 단을 이루며 하반신까지 내려가면서 전신을 덮고 있다. 두 팔은 옷주름 안으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으며 불신 외곽으로 길게 내려 복부 위에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형상이지만 법의 안쪽으로 표현되어 정확한 수인(手印)은 알 수없다.
불신의 규모는 전체 높이가 334cm에 달한다. 이 석불은 조성 위치나 신앙적 배경, 불두와 불신의 전체적인 조각 기법이 간략화와 형식화의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으며, 불신의 불균형적이며비사실적인 표현 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석불이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그 형식과 양식이 지방에서 조성된 석불들과 강한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 소재지 : 군내면 구암로 900
◎ 문의처 : 031) 940-4354